지도 - 오스터문디겐 (Ostermundigen)

오스터문디겐 (Ostermundigen)
오스터문디겐은 스위스 베른주의 베른-미텔란트구에 있는 자치체이다.

이 도시는 여배우 우르줄라 안드레스의 출생지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베른 구시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오스터문디겐에서 채석한 사암으로 지어졌다.

오스터문디겐은 1239년에 Osturmundingun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1279년에 그것은 Ostermundigen으로 언급되었다.

오스터문디겐은 단일 공동체를 형성하는 3개의 중세 마을(상, 중, 하)에서 발전했다. 세 마을은 다양한 귀족들이 영지로 소유한 14개의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들판 사이에는 다이스빌, 데니크코펜, 뢰르스빌, 로투스 및 베크뮐레를 포함하여 많은 작은 마을이 개발되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볼리겐 지자체의 일부였지만, 홀츠게마인데 ( 산림 협동 조합)는 제한된 공동 산림을 관리했다.

오스터문디겐의 마을은 이티겐, 페렌베르크 및 볼리겐의 분기와 함께 볼리겐 교구의 4분의 1을 형성했다. 1528년에 개신교 개혁 이 본당에 들어간 후, 구역은 부분적으로 자치가 되었다. 이제 각 분기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돌보고 해당 분기의 주민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책임이 있다. 결국 홀츠게마인데는 교육을 제공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1746년에 첫 번째 학교 건물을 지었다. 19세기 초까지 이러한 배치로 인해 5개의 다른 위원회가 있는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시 권력 구조가 만들어졌다(홀츠게마인데, 마을, 학교, 분기 및 도로 수리 및 유지 관리)가 모두 중복되는 권한을 보유한다. 이것은 볼리겐의 시 및 교구 평의회에 추가되었다. 1856년에 오스터문디겐의 시민들은 홀츠게마인데를 통합했다. 마을 의회와 분기 의회가 하나로 통합된다. 도로 수리 위원회와 4분의 1 평의회는 1872년에 합병되었다. 1945년에 교육구와 4분의 1이 마침내 통합되어 마침내 오스터문디겐 지구에 통합된 행정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지자체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으며, 지자체와 구역 간의 복잡한 권한 분할이 있다. 중앙집중화(1930, 1945, 1963), 베른 통합(1913, 1919) 또는 분권화(1956, 1962, 1972)에 대한 오랜 논쟁 끝에 주민들은 1978년에 지자체를 3개의 독립적인 지자체(볼리겐, 이티겐, 오스터문디겐)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지역사회는 독립된 시정촌이 되는 과정을 완료했다. 오스터문디겐 마을은 베른 고원으로 향하는 전통적인 무역로를 따라 가던 곳이다. 1500년경에는 이 무역을 위한 선술집과 세관이 있었다. 16세기부터 많은 베른 귀족들이 오스터문디겐에 시골 영지를 지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 중 일부는 1707년에 지어진 오스터문디겐구트, 시골 부동산 로투스(기본적으로 1671년에 시작된 후기 고딕 양식) 및 뢰르스빌 시골 부동산(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건설, 확장 및 개조됨)을 포함한다. 15세기까지 오스터문디겐은 사암 채석장으로 유명했으며, 1900년까지 베른의 거의 모든 건물은 오스터문디겐 사암으로 지어졌다. 1859년, 베른-툰의 오스터문디겐 철도는 채석장에서 고객에게 돌을 옮기는 것을 단순화하고 대규모 채석 산업과 광업으로 이어졌다. 1866년에 그들은 최대 250명의 광부와 함께 오스터문디겐베르크 아래에서 광산 갱도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1871년에 세계 최초로 랙 철도가 채석장에서 기차역으로 돌을 가져오는 말이나 노새 팀을 대체했다. 1900년 경, 벽돌과 시멘트가 새로운 건축물에서 석재를 대체하면서 사암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1907년에는 채석장이 폐쇄되고 터널이 벽돌로 쌓였다. 일부 채석장은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1850년 이후, 마을은 작은 농촌 마을에서 많은 중소 공장이 있는 공업 도시로 빠르게 변했다. 가장 큰 고용주 중 일부는 Zent AG(1898-1974년 운영), 종이와 판지 공장, 다이스빌(1876년 개업)과 발다우의 정신과 진료소였다. 그러나 가장 큰 공장은 인근 지자체에 있었고, 많은 주민들이 주변 지역 사회에서 직장으로 통근했다. 당시 세금은 거주지가 아닌 근무지에 따라 징수됐다. 오스터문디겐의 많은 주민들이 지역 사회 밖에서 일했기 때문에 오스터문디겐은 금융 위기에서 금융 위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속적인 재정적 압박으로 인해 중앙 집중화, 베른 합병 또는 분리 시도로 이어졌고, 결국 1983년 오스터문디겐이 독립 시정촌이 되면서 종료되었다.

 
지도 - 오스터문디겐 (Ostermundigen)
나라 - 스위스
스위스의 국기
스위스는 중앙유럽에 있는 연방 공화국이며, 내륙국이다. 수도는 법률상으로는 없으나, 베른이 사실상 수도 기능을 하고 있으며, 최대 도시는 취리히이다. 오래전부터 공식적으로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헬베티아 연방이지만 스위스 연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국가 도메인은 .ch으로 Confoederatio Helvetica의 약자이다. 타칭 국명은 스위스 연맹을 지도적으로 형성했던 슈비츠(Schwyz) 주에서 유래하였고, 정식 명칭은 로마 제국 시기의 헬베티족 또는 갈리아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 켈트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아족이 스위스에 정착했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에 대패한 뒤로 급속히 로마화됐다. 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서부 지역에 부르군트족, 동부 지역에 알라만족이 정착했다. 부르군트족은 사실상 라틴화되었고 알라마니족은 게르만 색채를 유지하여 언어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중세에 와서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배출됨에 따라 스위스의 자치권은 위축되었다. 1291년 스위스 지역의 3인 대표가 현재의 수도 베른에 모여 자치 보존을 위해 영구 동맹을 맺은 게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며, 이 동맹에 가담하는 주가 늘어났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1499년 스위스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바젤 조약에 따라 스위스는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이 되었고, 이는 파리 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1847년 천주교 분리주의 존더분트와 내전을 치른 스위스 통일전쟁을 겪은 이후에 스위스 최초로 중앙 정부가 들어섰지만 힘은 여전히 각 주의 정부보다 약했다. 스위스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여성에 대한 투표권 자체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1971년에 스위스 정부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통화 / 언어  
ISO 통화 상징 유효숫자
CHF 스위스 프랑 (Swiss franc) Fr 2
ISO 언어
DE 독일어 (German language)
RM 로만슈어 (Romansh language)
IT 이탈리아어 (Italian language)
FR 프랑스어 (French language)
동네 - 나라  
  •  독일 
  •  리히텐슈타인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  프랑스 
행정 구역
도시, 촌락,...